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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아버지의 해방 일지이다.
나의 아버지는 빨치산이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받고 출간 직후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소설은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3일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빨치산는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55년까지 활동했던 공산주의 비정규군을 지칭하는데요. 이 책의 저자이자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아버지는 전직 빨치산이었습니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내 아버지 고상옥 씨는 20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자본주의 중심인 서울로 향하지 않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심지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향에 터를 잡았다. 지리산에서 활동하다가 검거돼서 감옥에 갔던 빨치산 아버지. 하지만 소설은 아버지가 왜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는지 아버지가 아버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 아버지와의 사이가 살갑지는 않았다고 하니까요. 어린 시절을 빼고는 어쨌든 아버지는 평생토록 한 길만 고집했다는 점만큼은 확실했습니다. 그 결과 빨치산의 딸이라는 이유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록지 않은 삶을 버텨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했겠죠.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났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 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선택할 수 있었다면 누군들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겠는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연좌제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가족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아버지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 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 책임을 지우는 제도인데요. 1894년 조선시대 때 완전히 폐지되었던 이 연좌제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직후인 7월에 부활을 했습니다. 이후 19년간 유지가 되다가 1980년 8월 1일에 공식적으로 폐지가 됐죠. 그러니 저자의 어린 시절 빨치산 아버지는 일가친척들에게도 짐이 되었죠. 사촌 오빠는 육사에 합격을 하고도 신원 조회에 걸려서 입학을 하지 못했고 사실상 집안 모두가 알게 모르게 빨치산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서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아왔던 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오빠의 앞길을 막은 게 큰어머니는 세상 떠날 때까지 천추의 한이었다. 오빠는 마음은 어땠을지 모르나 겉으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반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오빠는 봄이 되자마자 군대에 갔다. 제대한 오빠는 훌쩍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간혹 마주칠 때가 있었지만 오빠는 예전처럼 살갑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그랬다 누구와도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무엇을 해도 건성이었다. 몇 년 뒤, 연좌제가 풀리고 오빠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빨갱이의 딸인 나는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인 오빠가 견뎌야 했을 인생이 더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자기 인생을 막아선 게 아버지의 죄도 아니고 작은 아버지의 죄라니 빨치산 아버지의 딸인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향인 구례로 내려와 사흘간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아버지의 자식이라곤 결혼도 하지 않은 외동딸 나 하나뿐인데 누가 오려나 했지만 장례식에는 의외로 조문객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빨갱이 작은 아버지를 둔 덕분에 육사에 합격하지 못한 사촌 오빠도 오고 아버지의 옛 동료들도 오고 아버지의 어린 친구도 오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조문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저자는 한 사람으로서 나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문을 온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알아갑니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해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자신을 아버지의 담배 친구라고 말하는 샛노란 머리의 17살 소녀 아버지와 총부리를 맞서고 싸웠지만 친구가 된 사람들 빨갱이 형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고 말하는 평생의 원수 작은 아버지. 고함 소리에 방문을 열었더니 아버지는 마루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고 취해서 비틀거리는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의 손에는 소주병이 들려 있었고 삿대질을 할 때마다 맑은 소주가 출렁거리며 쏟아졌다. 그래서 아버지는 수시로 작은 아버지의 악다구니를 들으면서도 돌부처처럼 묵묵히 우리 집이나 작은 집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만 뻐끔거렸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다
저기가 내가 좋아하는 막내 삼촌이 사는 곳이다. 응암동은 내가 좋아하는 막내 외삼촌이 사는 곳이었다. 나는 아버지 어깨 위에서 신이 나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저게 오른쪽에 제일로 환한 불 보이지 저기가 삼촌 집이여 봐 봐라 삼촌이 지금 이마에 힘껏 싸매고 공부하고 있잖아. 눈을 비비고 아무리 봐도 수건을 두르고 공부하는 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새빨간 거짓말인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도 떴다가 왕방울만 하게도 떴다가 삼촌을 보려고 기를 썼다. 우리 아이도 삼촌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갈 거지 가느스름 뜬 눈 사이로 불빛을 등진 채 커다란 보따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가 나타났다. 짐이 어찌나 무거운지 어머니 걸음이 비틀거렸다. 아버지는 나를 얼른 내려놓고는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나를 버리고 어머니에게 달려간 아버지가 서운해서 나는 목청 놓아 울었다. 목에 걸린 누룽지를 뱉어내며 나는 서럽게도 울었다. 어머니가 등을 내밀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결국 한 손에 어머니 짐을 받아 든 아버지가 나를 등에 업었다. 그제야 나는 울음을 그쳤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등을 자장가 삼아 나는 까무룩 잠들었다. 한 손으로 나를 바치기 힘들었는지 아버지가 내 엉덩이를 치켜올리는 통에 잠시 잠에서 깼다. 나는 항상 엄마보다 아버지가 최고였다고 잠결에도 말을 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 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에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반응형'책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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